오래가는 즐거움
퇴근하고 나면 집 앞 체육관으로 운동하러 간다. 재작년에는 헬스, 작년에는 수영을 했고 올해는 복싱을 하고 있다. 헬스를 다시 하려다 얼떨결에 복싱을 시작한 지 다섯 달째다. 영어 공부도 시작했다. 주 2회 20분씩 화상으로 선생님을 만나 영어 회화를 한다. 5일 중 이틀은 운동을, 이틀은 영어 공부를 하는 셈이다.
평일 저녁을 웬만하면 누구에게 양보하지 않고 친구에게조차 야박하게 구는 나는 운동도 영어 공부도 대개 빠지지 않고 해 왔지만 요즘 그렇지 않은 날이 늘었다.오늘은 운동해야지, 출근하기 전 가방에 복싱 글러브를 챙기며 결심한다. 그 결심은 퇴근하는 길 지하철 안에서 작은 실랑이로 이어진다.
'몸이 조금 피곤한 것 같아. 피곤하면 무리하지 말아야 하는데. 아무래도 집에 가서 쉬는 게 좋겠어.'
'지난번에도 그렇게 말하고 안 갔잖아!'
'다음부터 빠지지 않고 가면 되지. 그래도 충분해.' '다음에 안 빠질 자신 있어?' '코치가 바뀌고 나서 재미가 없어졌잖아. 집에서 혼자 연습해도 충분하다고.'
이렇게 나오면 열의 아홉은 가지 말자는 쪽이 이긴다. 나는 아침에 챙긴 복싱 글러브를 고대로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다. 물론 집에서 연습하지 않는다. 영어 공부도 비슷한 사정이다.
'오늘은 집에 평소보다 늦게 왔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저녁 준비해서 먹고 나면 시간이 빠듯하겠다고. 영어로 말하려면 조금이라도 준비해야 하잖아.' '빠듯하긴 하지만 못할 정도는 아니야.' '오늘은 영 영어로 말할 기분이 아니야.' '수업을 연기하면 되지. 연기하고 나중에 보강 신청하면 되잖아.' '응? 내 말이 그 말이야.'
어느새 둘의 의견이 일치해 버리는 바람에 결국 수업을 연기한다.
운동도 안 하고 영어 공부도 미루고 나면 침대에 누워 엄지손가락으로 능숙하게 휴대폰 화면을 스크롤한다. 아무 생각 없이 인스타그램을 열고 팔로우하는 이들의 새로운 게시물을 본다. 회원님을 위한 추천이라며 광고와 릴스가 연이어 등장하는 통에 돋보기로 넘어간다. 알고리즘에 따라 돋보기가 화면에 온갖 정보를 띄운다. 유머, 연예, 생활 등 다양한 주제의 정보들이 초 단위로 머릿속에 들어온다. 친오빠에게 연애 상담하면 안 되는 이유, 연예인 누가 올린 사과문, 라운드숄더 쫙 펴는 꿀팁… 끝이 없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시간은 한참 지나가 있고 휴대폰 화면이 꺼짐과 동시에 즐거움은 사라진다. 나는 침대에 덩그러니 놓여 운동도 영어 공부도 안 한 것을 후회했지만 다음 날이 되면 습관처럼 다시 휴대폰을 찾았다.
반면 열의 한 번, 온갖 그럴듯한 핑계와 유혹을 이기고 막상 운동하러 가면 그렇게 재밌을 수 없었다. 마지못해 체육관에 가서 운동복으로 갈아입을 때만 해도 하기 싫어 툴툴대다가 몸을 풀기 시작하면 어느덧 귀찮음을 이겨낸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 운동이 주는 희열을 맛보며 실컷 땀 흘리고 나면 온몸이 개운하고 활력이 넘쳤다. 이렇게 재미있는데 왜 안 하려고 했지? 영어 공부도 마찬가지다. 하기 전까지는 하기 싫어 죽겠다가도 막상 수업이 시작되면 내내 웃으며 한 문장이라도 더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잘하든 잘하지 못하든 끝나고 나면 성취감에 젖어들었고 그 감정은 오래 남았다.
시작에 아무런 거리낌 없는 일은 끝나고 나면 거리낌이 생기고, 하려면 번거롭고 성가신 일은 끝나고 나면 더욱 하고 싶어졌다. 하나는 즐거움이 노력 없이 주어지는 대신 찰나에 있고 다른 하나는 즐거움을 찾으려고 애써야 하는 대신 찾고 나면 내 것이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되도록 즐거움이 오래 가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래야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고 야박하게 굴 만한 시간이 될 테니까.
오늘도 퇴근하는 길, 지하철 안에서 두 개의 목소리가 실랑이했다. 내일 하면 되지 않냐고, 다음에 하면 되지 않냐고. 모른 척 그 말에 넘어가고 싶지만 마음을 먹고 몸을 움직이고 난 후에 오는 즐거움을 알기에 잊지 않고 기억하려고 한다. 즉각적인 재미보다 나를 고양하는 일을 더 자주 선택하려고 한다.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