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하다’ 이 단어를 처음 만났을 때는 고등학생이었다. 야자를 하고 독서실에 다녀오면 새벽 2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고, 그때의 난 일종의 보상심리로 잠을 자지 않고 새벽까지 버티던 이상한 습관이 있었다. 야자 때는 절대 읽지 못하게 하는 책을 읽는다던가, 인터넷 바다에 빠져 있다던가 했다. 창으로 새벽 어스름이 들어오면 나는 새벽을 맞이하기 위해 언제나 창문을 활짝 열었다. 방은 한순간에 새벽 냄새를 머금었고, 스며들어오는 냄새를 킁킁대다가 침대에 몸을 눕히는 게 그때의 일상이었다.
‘생경하다’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새벽 5시가 넘은 시간, 곧 반이 바뀌는 종업식과 개학식의 사이에서 붕 뜬 시간만큼이나 마음이 요동치던 시절. 스산한 겨울의 질감과 봄의 미지근하고도 가벼운 공기가 떠다니던 시간. 미처 녹지 못한 눈과 목련의 꽃망울이 동시에 존재하던 그 혼돈의 소용돌이에서 만난 단어가 말 그대로 생경해서 몇 번이나 입으로 혀를 굴려 발음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는 모든 게 불명확한 시절이었다. 어제 본 못마땅한 모의고사 성적에 송두리째 내 미래가 흔들리곤 했다. 만약, 수능을 잘 보지 못한다면 고향에 남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고 서울로 대학을 간다고 해도 친구들과는 지금보다 멀어질 것이 분명해 기분이 요상했다. 당시에는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욕망’이 공부에 가장 좋은 촉진제였는데 동시에 내가 두고 있는 적(籍)을 부정하는 기분이 들어 그건 그거대로 찝찝했다.
와중에 만난 ‘생경하다’는 이런 현실에서 잠깐 벗어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감각 같았다. 사전에 있는 정확한 뜻은 ‘익숙하지 않아 어색하다.’로 다소 부정적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 내게는 그 ‘어색하다’의 의미가 ‘오롯이 새롭다’의 긍정적인 의미로 다가왔다. 곧 하게 될 서울에서의 대학 생활, 서울에서 누릴 문화생활, 원하는 일을 하게 될 미래에 대한 기대감, 앞으로 만날 운명적인 남자친구 또한 그 범위 안에 있었다.
비슷한 말인 ‘어색하다’, ‘생소하다’는 감정에 가까운 말처럼 보이지만 ‘생경하다’만큼은 감각적인 측면으로 단어를 느낄 수 있어서도 좋았다. 더군다나 한자로 ‘날 생(生)’자를 쓰고 있어 ‘생경하다’를 떠올리면 ‘생생한 해상도로 다가오는 어떤 미지의 장면’처럼 느껴졌다. 미지의 장면에는 그 어떤 공상도 가능해서 좋았다. 상상이 차고 넘치더라도 생각의 크기와 관계없이, 단어는 그 모든 걸 담아낼 수 있었다.
‘생소’를 발음할 때는 입모양의 변화가 많이 없지만, ‘생경’을 발음할 때는 ‘경’에서 턱이 아래로 좀 더 내려가며 입안에 넉넉한 틈이 생기는 점도 좋았다. 빈 공간 사이로 들이마시는 공기가 낯섦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관용과 여유처럼 느껴졌다.
이렇게 ‘생경하다’를 애정 하게 될 이유는 차고 넘쳤다. 가장 많이 사용할 때는 아무래도 새로운 경험을 마주했을 때거나, 일상이 여행처럼 느껴질 때다. 이 단어를 쓰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느낌과 상황이 있다. 누군가 내게 단어의 의미를 물으면 곤란해진다. 다른 말로 대체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여전히 좋아하고 종종 사용하고 있다. 전에는 단순히 손에, 입에 붙어서 ‘생경하다’를 자주 사용하는지 알았는데, 돌아보니 새삼 이유가 많기도 하다.
이것도 역시, 톺아보니 생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