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한 단어를 유독 자주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 단어가 그 사람을 떠올리게 하는 정도로 말이다. 사람마다 습득하여 형성한 단어의 체계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즐겨 듣는 팟캐스트의 어느 진행자는 ‘이를테면’을 자주 사용한다. 내가 예를 들 때 정직하게도 예를 들면을 사용하는 것처럼 그는 이를테면을 사용한다. 한 번도 입 밖으로 소리 내 본 적 없고 글로 써 본 적 없는 생소한 단어를 그를 통해 접하고 반복하여 듣는다. 나는 이제 이를테면이라는 단어에서 그를 본다.
내게도 자주 쓰는 단어가 있다. 이를테면 아무래도다. 평소와 같이 글을 쓰던 중 문득 이 단어가 이전에도 여러 번 사용된 것 같다고 느꼈다. 느낌 탓인가 싶어 지금까지 쓴 글 중 아무래도가 들어간 글을 찾아보았다. 느낌 탓이 아니었다.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아
아무래도 나뿐인 것 같다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것 같다
아무래도 그는 ~할 계획인 것 같다
아무래도 ~하는 게 좋겠다 이 외에 아무래도가 빠져도 의미를 전달하는 데 문제가 없는 문장에도 아무래도를 썼다.
아무래도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또는 ‘아무리 이리저리 하여 보아도’라는 뜻이다. 아무리 즉 정도가 매우 심하게, 생각하고 행동하였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뒤로는 자연스레 추측이나 판단의 말이 이어진다. ‘같다’, ‘보다’, ‘싶다.’ 등의 단어와 어울려 쓰이기도 한다. 나 또한 ‘아무래도 나뿐인 것 같다.’, ‘아무래도 그는 ~할 계획인 것 같다.’와 같이 주변 상황을 추측하거나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아’, ‘아무래도 재능이 없는 것 같다.’와 같이 나의 상태를 판단하는 데 아무래도를 사용했다. 아무리 생각해 보고 이리저리하여 보아도 내린 추측과 판단. 그러니 그에 따른 선택까지도 마땅할 것이라는 믿음. 구구절절한 부연 설명 없이 단 네 글자로 불확실한 생각에 타당성을 부여하다니 놀라운 단어다.
글쓰기 모임을 함께하는 수영은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는 최선을 다해야만 쓸 수 있는 단어네요.” 그래서 궁금해졌다. 내가 이 단어를 자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다하는 최선은 무엇일까.
후회하는 삶이 두려운 나는 어릴 적부터 옳은 선택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옳은 선택이란 후회를 최소화하는 선택이다. 나는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오면 각 선택이 가져올 후회의 양을 가늠해 보고 결정을 내렸다. 시험을 준비할 때도, 전공을 정할 때도, 휴학을 할 때도, 직업을 고를 때도 그렇게 했다. 미래에 있을 만족은 아득하여 감이 잘 오지 않지만 후회를 헤아리기는 조금 더 수월했다. 모든 선택은 적어도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방식은 마치 단어의 체계가 그러하듯 체화되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는 큰 선택뿐 아니라 일상의 작은 선택에도 영향을 미쳤다. 무엇을 할지 말지, 한다면 어떤 것을 할지, 하기에 적절한 시기인지, 그럴듯한 계기가 있는지, 더 나은 방안은 없는지. 답을 구하기 위해 나 자신과 나를 둘러싼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고 수없이 가정해야 했다. 아무래도는 그 모든 노력을 단번에 함축하는 말이다.
최선이 언제고 최선을 보장하지 않는다. 나의 최선도 마찬가지다. 치열한 고민 끝에 내린 선택의 결과가 그리 탐탁하지 않을 때도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은 내가 후회를 두려워하더라도 일단 선택하고 나면 결과를 두고 후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선택에 담겨 있는, ‘아무래도’가 지닌 무수한 노력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겠다. 앞으로도 나는 이리저리 생각해 보고 행동해 가며 살아갈 것이다. 그 결과가 예상대로 흘러갈 수도 있겠지만 예상 밖이라고 해도 어쩌겠는가, 그게 인생인 것을. 잠깐 유효한 노력일지라도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방식이며 아무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