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꺼지지 않는 불빛, 길을 밝히는 가로등, 바다와 강을 가로지르는 대교의 조명, 수면에 비치는 빛의 반영. 멋진 야경을 떠올리면 그려지는 요소다. 세계적인 야경으로 손꼽히는 나라가 있고 그만큼 유명하지는 않더라도 나라마다 각자의 야경 명소를 지니고 있다. 야경은 관광 산업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며 날이 갈수록 발전한다. 그럼에도 나는 지금까지 여행을 하면서 야경을 특별히 찾아보지 않았다. 여행지로서 도시보다 자연을 선호하고 해가 지면 숙소에 들어와 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야경이 내게 별 감흥을 주지 못한다는 점이다. 야경은 대체로 관망으로 이루어지는데 내게는 그 거리가 너무 멀어서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우리나라에서 꽤 대중적인 해외 여행지인 홍콩을 여행지로 생각해 본 적 없다.
지난 5월, 홍콩공항공사에서 관광 활성화를 위해 전 세계 여행객들에게 왕복항공권을 증정하는 행사가 있었다. 응모하는 당일에 출근하다 우연히 알게 되어서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가벼운 마음으로 신청하고는 잊고 있었는데 어느 날 메일이 온 것이다. ‘축하드립니다! 항공권에 당첨되셨습니다!’ 이제 숙소만 예약하면 되겠다고 들떠서 호텔을 알아보다가 생각보다 비싼 숙박비에 당황했지만, 무료 왕복항공권에 당첨되었는데 어떡해. 가야지. 숙박비는 내가 낼 테니 항공권만 잘 구해보라는 말로 동생 준을 꼬드겼다.
계획에 없던 나라이다 보니 아는 것도 없었다. 막연하게 홍콩 영화에 마니아층이 있다는 것과 야경이 유명하다는 것만 알았는데 그마저도 홍콩 영화를 보고 자란 세대도 아니고 야경에 관심이 있지도 않았다. 가기 전에 영화 한 편은 보고 가려고 중경삼림이란 영화를 이해가 안 가도 끝까지 보고, 야경이 유명하다니 액션캠 대신 곧 10년이 다 되어가는 카메라를 챙긴 것이 나름의 준비라면 준비였다.
첫날 늦은 오후에 도착해 숙소에 체크인하고 홍콩섬 야경을 보러 침사추이에 갔다. 그곳은 매일 저녁 8시에 ‘심포니 오브 라이트’를 즐길 수 있는 홍콩에서 가장 유명한 야경 명소다. 센트럴에서 페리를 타고 침사추이 부두에 도착하자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들로 붐볐다. 벌써 벤치에 자리를 잡고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준과 나는 근처에서 간단히 저녁을 먹고 나와 무리에 합류했다. 하늘이 어두워질수록 바다 저편에서 홍콩섬의 빌딩들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심포니 오브 라이트가 시작되었다. 음악에 맞춰 전광판이 깜빡이고 레이저 빛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화려하고 멋졌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수평선 위로 솟은 수많은 고층 빌딩이 두 눈 안에 담기고 남을 만큼이나 먼 거리에서 고정된 경치는 별 감흥을 남기지 못하고 금방 무료해졌다.
둘째 날은 마카오에 다녀왔기에 셋째 날 저녁이 홍콩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마지막 밤이니 이층 버스를 타고 홍콩섬을 돌아보는 나이트 투어를 하기로 했다. 매일 이만 보 이상을 걸어 다니느라 다리와 발에 피로가 쌓일 대로 쌓여서 더는 걷기 힘들었기에 버스 좌석에 편히 앉아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았다. 탑승하려고 대기하는 중에 준이 안내문에서 투어 경로를 살펴보고는 왼쪽보다 오른쪽 좌석이 구경하기 더 좋겠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나보다 세심한 자이니 그의 말에 따르기로 했다.
타고 나서야 무슨 말인지 알았다. 준의 말대로 오른쪽 좌석은 구경하기에 더없이 적당한 거리였다. 왼편은 건물이 너무 가까워 시야에 한계가 있지만 오른편은 사이에 차도를 두고 있어서 먼 곳도 가까운 곳도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는 것이다. 손 내밀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신호등이 불을 바꾸고 옆으로 갖가지 색의 트램이 마찰음과 함께 스쳐 지나갔다. 시선을 돌려 버스 아래를 내다보면 빨갛고 네모난 택시들이 줄지어 지나갔다. 도로 건너편에는 불 켜진 상점과 사람들이 보였다. 사람들은 횡단보도를 건너고 정류장에 줄을 서고 음식점에서 먹을거리를 구입했다.
버스는 홍콩섬 골목골목을 누볐다. 버스가 움직임에 따라 먼 곳은 가까워지고 또다시 먼 곳은 가까워졌다. 그동안 부지런히 다니며 보았던 곳들을 다시 보고 미처 보지 못했던 곳들을 새로 보았다.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와 소호 거리를 지날 때는 서로 우리가 낮에 갔던 데라며 앞서 말했다. 건물 바깥으로 아슬아슬하게 설치된 각양각색의 휘황찬란한 간판들이 서서히 가까워지다가 머리 바로 위로 지나갔다. 가로로 길어 차도의 반 이상을 나온 간판과 가장자리는 초록색, 글자는 빨간색 네온사인으로 빛나는 간판과 이파리 모양의 간판을 지났다. “닿을 것 같아!” 나는 손을 살짝 뻗어보며 낄낄거렸고 준은 다 뻗어도 어차피 닿지 않는다고 말하며 웃었다. 거리가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않은 이층 버스 오른쪽 좌석에서 나는 이제야 홍콩의 밤을 제대로 보고 있다고 실감했다.
돌아올 때는 큰길을 따라오면서 빌딩들을 구경했다. 첫날에 바다 저편에서 보았던 빌딩 숲을 부분 부분 조각내어 확대해 보는 것 같았다. 마치 다른 행성이나 미래의 지구로 온 것 같은 광경에 눈을 떼지 못하고 내내 등받이에 고개를 젖힌 채 탄성을 연이어 지르며 동생과 이야기했다. 이번 여행의 최고의 순간을 꼽자면 바로 지금이라고. 이런 야경이라면 몇 번이고 찾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