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제와 함께하는 부산
나고 자란 곳을 빼고 가장 시간을 많이 보내는 도시는 부산이다. 일 년에 한 두 번쯤 내려가는데 이유 중 팔 할은 부산 국제영화제다. 짧으면 3일, 휴가를 운좋게 길게 쓸 수 있다면 5일까지 부산의 가을밤에 머문다. 여행의 시작은 역에 내리면서 시작된다. 부산역을 나오자마자 확연히 달라진 공기의 질감과 부산항 어귀에서 끼쳐오는 바다 냄새를 맡으며 부지런히 발을 옮긴다. 백팩을 메고 걷는 내 앞과 뒤로 사람들의 말투가 시시각각 바뀌는 걸 느끼며, 부산역 앞 도로에서 빵빵거리는 소리를 느끼며 부산에 왔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택시를 타기 전에는 에어팟을 귀에서 뺀다. 부산 택시 기사님들은 수다쟁이 기사님들이 많아 타자마자 여행의 목적부터 내 본관까지 물어보는 호구조사가 곧 시작될테다. 지금 살고 있는 서울에서 이런 질문을 받으면 적당히 대꾸하고 넘겼겠지만 부산 택시 기사님들이 부리는 오지랖은 싫지 않다. 부산역에서 해운대 근처까지 택시로는 30분 정도가 걸리는데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내 이야기를 탈탈 털어준다. 한참 이야기가 무르익으면 꼭 기사님들께 국밥과 밀면 맛집을 물어본다. 놀라운 건 절대 그 리스트가 겹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각자의 최고 맛집이 모두 다르고, 자신의 최애 맛집을 굉장히 자랑스러워한다. 어느 정도냐면 금방 점심으로 국밥을 먹었다고 말해도, 이따 저녁에 자신이 추천하는 그 국밥집을 꼭 가보라고 하는 식이다. 이렇게 말하는 기사님의 얼굴은 ‘우리 아빠가 최고야’라고 말하는 어린 개구쟁이와 닮아있어서 기사님의 보이는 빽미러를 자꾸 바라보게 된다. 택시를 타서 마법의 주문을 외치면 순간이동을 할 수 있는 것도 좋다. ‘늦어서 조금만 빨리 가주세요’라고 말하면 정말 화장실을 들렀다 올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을 벌어 준다. ‘예매한 영화 시작이 N분이라’, ‘기차가 N시에 출발해서’와 같이 구체적인 수치를 들어 이야기를 한다면 정신보다 몸이 더 먼저 도착하는 유체이탈의 경험도 함께할 수 있다. 단돈 택시비로 원하는 시간에 도착도, 진귀한 경험도 할 수 있는 호사다. 영화와 영화 사이에는 국밥, 밀면, 낙곱새, 일식(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부산에는 일식 맛집이 많다) 맛집들로 알차게 채워넣는다. 영화가 끝난 후 돌아오는 길에는 자주가는 회센터에 전화를 걸어 밀치회를 포장하고, 날씨가 춥지 않다면 포장마차 초장집으로 향한다. 대선 소주를 시켜놓고는 노트를 펼쳐 오늘 본 영화에 대한 날것의 감상을 써내려간다. 소주가 한 잔, 두 잔 들어가면 찰싹거리는 파도 소리가 감정을 증폭시킨다. 그러다보면 어느새 ‘혼자 포장마차에 들어와서 골똘하게 쓰면서 별안간 울고 있는 이상한 사람 1’이 된다. 눈물과 콧물이 차올라 급하게 휴지를 찾으려 고개를 들면 나를 슬쩍슬쩍 쳐다보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친다. 민망하다. 아무렇지 않은듯 얼른 코를 풀고 더 울컥거릴 게 남았는지 생각해본다. 오늘 본 마지막 영화가 아직 마음에 응어리져 남아있다면 밖으로 나가서 바람을 맞을 때다. 편의점에서 순하리 같은 걸 사서 광안리를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며 마신다. 훌쩍거리고 찔끔거리며.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꼭 영도에 있는 ‘손목서가’를 들른다. 손목서가의 도장이 찍힌 책을 하나, 드립커피를 하나 시키고 자리를 찾는다. 이제는 너무 유명해진 카페라 자리가 없을 때도 있지만 조금 버티면 또 금방 자리가 난다. 가끔은 너무 햇빛이 내리쬐어 남들이 앉지 않는 테라스에 앉아 설탕을 뿌린 듯 반짝거리는 영도 바다를 하염없이 쳐다본다. 기차 출발까지 시간이 여유롭다면 부산역 근처에서 마지막 식사를 한다. 남포동 국제집의 해물전골일수도, 초량의 국밥이나 밀면일수도 있다. 당분간 못먹을 부산 음식을 수혈하는 느낌으로 경건하게 음식을 대한다. 넷플릭스 같은 건 켜지도 않고 음식에 집중한다. 소주 한 병도 빠질 수 없다. 그렇게 반쯤 몽롱한 상태로 기차에 몸을 싣고 이번 여행을 반추한다. 이번 여행에도 남에게 관심이 많은 따뜻한 사람들을 만나고, 마음껏 영화를 보고, 호전적인 택시와 버스 기사님을 만났으며, 새로운 국밥집과 맛집을 발견하면서도 모든 음식이 다 맛있었다. 손목서가에서 바라보는 영도 앞 바다도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래서 난 여전히 부산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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