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빛이 느리게 걷는 시간
취업을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입니다. 경기도의 거실과 방이 있는 아파트에서 혼자 산 적이 있어요. 오빠는 춘천에서 일을 했고, 아버지는 사정이 있어 다른 곳에서 지내셨어요. 혼자 살기엔 넓고 쾌적한 평 수였지만 그 집을 누릴 시간은 짧았습니다. 제가 취직한 곳은 서울 역삼의 한 사무실이었던 탓에 출퇴근을 할 때는 한 시간 반이 넘는 거리를 사람들이 꽉 찬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어요. 일찍 퇴근해 집에 오면 여덟 시, 서둘러 식사를 차리고 나면 여덟 시 반. 쫓기듯이 밥을 해 먹고, 다음날 출근을 위해 취침 시간을 어기지 않으려고 얼마 남지 않던 여가 시간 동안 급하게 그날의 할 일들을 하는 매일을 보냈어요. 당시에는 아버지께서 운영하시는 작은 조경 회사의 사무를 볼 사람이 없어, 퇴근하면 바삐 집에 가서 아버지께서 맡긴 일을 도와드려야 했습니다. 가끔은 억울했어요. 퇴근하면 서울에서 친구들과 만나서 놀거나 재밌는 것을 하러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거든요. 연차가 차서 회사에서도 조금은 요령이 생긴 지금은 그때를 생각하면 미련하게 느껴집니다. 일이 많은 것에 대해 아버지와 조율할 생각은 못 하고는 속으로 꿍얼대며 꾸역꾸역 일을 했었거든요. 마음속에 구덩이를 파 놓고 아무한테도 못할 말들을 모아 묻어두면서요. 어쩌다가 눌러놓은 마음이 밖으로 새어 나올 때면 친구들에게 칭얼거리곤 했는데, 친한 친구가 저에게 놀리듯이 ‘축하해, 너는 퇴근이 없네. 늘 출근 중’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이 나요. 회사에 적응하기에도, 퇴근하고 일을 하기에도 바빴던 그 나날들 속에서 그래도 무척 넓었던 그 집은 저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줬습니다. 아무 약속도 없고 아무런 일에 쫓기지 않는 주말의 오후 네 시의 어떤 장면이 지금도 생각이 나요. 불을 켜지 않아도 창문으로 들어오는 볕 덕분에 환한 거실, 가지런히 놓아진 물건들의 길어지는 그림자. 거실 가운데에 놓은 테이블 위에 넓은 연습장을 펼쳐 놓고, 좋아하는 색깔펜을 골라 연습장 위에 떠오르는 말들을 아무렇게나 끄적거리던 시간. 해가 산 너머로 넘어가기 위해 느릿느릿 걷는 것 같은 그 시간의 여유와 평화는 지금도 떠올리면 위로가 돼요. 누구에게나, 모든 게 처음이고 나만 혼자인 것 같아 버거운 날들이 있겠죠. 신입사원이었던 그때의 제가 그랬어요. 아무도 깨워주지 않는 아침에 눈을 뜨는 것도, 졸린 눈을 비비며 매일 한 시간 반이나 걸려 출근을 하는 것도, 하루의 대부분을 일터에서 나에게 무관심한 사람들과 보내야 하는 것도, 퇴근해서도 지친 마음을 돌볼 시간 없이 계속해서 일을 하는 것도 모두 버겁게만 느껴졌어요. 어느 날 집에 왔는데 축축한 날씨 탓에 빨래가 마르지 않아 울던 나날들 속에서, 가만히 수면 위로 떠오르는 마음을 물끄러미 들여다볼 수 있었던 주말 오후 네 시는 여전히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에요. 숨 쉬듯 많은 일들을 해내고 또 여전히 갖고 싶은 것들을 쫓아가느라 바쁘고 정신없이 보내더라도, 주말의 하루 정도는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는 잔뜩 게을러진 채로 시간을 보냅니다. 저에게 여유와 평화를 선물해 준 넓었던 그 집에는 더 이상 살지 않지만, 그때의 기억 덕분인지 여전히 평화로운 풍경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되었네요. |